융무당은 고종 5년(1868)에 신무문 밖 북악산 기슭의 경복궁 후원지역 (현재 청와대 위치)에 중건된 건물입니다.
융무당과 융문당 일대의 넓은 공터는 후원의 다목적 공간으로 국가에서 과거를 치를 때와 무술대회를 열 때 시험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특히 융무당은 국왕이 친히 납시어서 군사훈련을 시범사열 할 때와 문무 고위 관리들과 활쏘기를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1929년 5월에 융무당과 융문당의 건물을 헐어다 한강로의 일본인 절 용광사를 짓는데 사용하였으며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의 관저를 지었고, 해방 후 1946년 원불교가 인수하여 융무당은 서울교당의 생활관으로 융문당은 법당으로 사용되다가 영광으로 두 건물이 이전되었습니다.
융무당은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의 부속건물로 복원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되는 건축물로 조선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망와 (望瓦, decorative tile standing at the end of roof ridge)
망와는 장식기와로 지붕의 용마루 끝이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 끝에 마감을 위하여 암막새를 뒤집어 이은 것과 같은 기와를 올리는데 이를 망새기와, 망와라고 한다. 문양은 다양하여 여러 종류의 동물문을 사용하는데 그 중 귀면이나 용의 형상을 한 것등은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집안의 안녕과 평화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의 나쁜 잡신이 들어오지 말라는 뜻에서 대부분 험상굿은 모양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망와는 주로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이 많고 색깔은 주로 회색이나 검은색을 띠고 있다. 또한 조선 후기 망와는 글자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제작연도나 수복(壽福)을 상징하는 문자를 새긴다. 간혹 추녀마루 끝에 말안장처럼 생긴 원통형의 망와가 놓기도 하는데 이를 바래기와도 있다. 또는 곱새기와라 한다.
잡상 (雜像, a set of decorative roof tiles on the roof over angle rafter)
잡상은 정전 지붕위에 설치한 각종 동물 모양의 조각상이다. 잡상은 잡귀와 요괴들이 건물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와제(瓦製) 토우(土偶)들. 장식기와의 하나이다.
≪조선도교사≫에 의하면, 궁궐의 전각과 문루의 추녀마루 위에 놓은 10신상(神像)을 일러 잡상이라 하는데 이는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土神)을 형상화하여 벌여놓아 살(煞)을 막기 위함이라 한다.
다. 잡상은 우리의 ≪궁궐의궤≫에도 잡상·용상(龍像, 昌慶宮營建都監儀軌, 1834)의 이름이 나온다. 설계입면도에는 매우 간략히 그려져 있어 그 형상 하나 하나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건축 자료가 희귀하여 조선시대 19세기 이후 것만 자료로 남아 있는데, 선인상 또는 대당사부 현장상은 없으며 손오공상이 가장 앞에 놓여 있다. 또, 중국에는 궁궐·문루·관아·능사(陵祠)·사찰의 지붕 위에 잡상이 보이나 우리나라 사찰 지붕에는 그 예가 많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숭례문은 9개, 창경궁 홍화문은 5개, 창덕궁 돈화문은 7개, 수원 팔달문은 4개, 창덕궁 인정전은 9개, 경복궁 경회루는 11개, 경복궁 동십자각은 5개, 덕수궁 중화전은 10개여서 지붕 한쪽에 올려놓은 수가 4∼11개로 제각기임을 알 수 있다.
암막새(瓦當, roof-end tile)
지붕의 바닥면에 깔리는 기와를 암키와라고 한다. 고구려시대에는 일찍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백제나 신라에서 볼 수 없는 반와당, 부고막새기와를 사용하였고, 연판문을 이용하여 초기에는 고구려 와당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형식인 연판문에 6판, 4판 등의 연판 양 끝이 뾰족하고 단면이 3각형에 가깝도록 융기되고 다시 세로줄을 내어 매우 경직되고 예리한 느낌을 주는 형태가 제작되었다. 또한 고구려 와당 중에 초기 것은 회색빛이 나고 후기는 붉은 색이 나는 것이 특색이다.
백제시대에는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인 교류로 처음부터 연판문이 제작되었다. 중앙의 자방을 중심으로 자방 쪽이 좁고 주연쪽이 넓어지는 연판을 구획선 없이 8판을 배치하는 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표현 양식에서 느껴지는 것이 고구려와는 달리 온화하고 유연한 감을 준다.
신라시대에는 종류나 문양이 삼국 중 가장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연판의 배치형식은 구획선이 없이 자방을 중심으로 연속 배치하되 8판이 기본형이고, 간혹 6판도 있으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차츰 판수가 증가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암막새는 외부는 주문으로 장식된 네모난 주연부분이 있고 내부는 당초, 보상화당초, 포도당초, 화엽당초 등과 같은 좌우 대칭의 덩굴무늬가 새겨 진 것이 많고 그 외에 서조, 기린, 용등의 무늬가 새겨진 것도 있다. 암막새는 시대에 따라 특징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암막새는 직사각형이 활모양으로 휘어진 형태이다. 그 막새면에는 당초문과 함께 인동, 보상화문양이 새겨진 것이 많고, 봉황·용·기린·비천·구름·꽃 등의 문양이 첨가된 것도 있다.
고려시대 암막새는 통일신라시대의 문양들이 계속 제작되었고, 여기에 풀꽃· 곤충 등의 문양이 첨가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연주문이 장식되는 경우가 간혹 있었으나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수막새와 마찬가지로 귀목무늬(鬼目紋)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인데 2개를 좌우대칭으로 표현하였다.
조선시대 암막새는 고려시대의 모양과 문양들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하단부가 밑으로 늘어진 역삼각형과 반달형에 가까운 새로운 형태가 제작되었다. 막새면을 종선을 그어 여러 면으로 구획한 후 기와를 올린 시주자라든지 제작 시기를 표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된 암막새는 조선시대 융무당 지붕에 있었던 암막새로 조선시대 궁궐의 기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융무당은 국왕이 친히 납시어서 군사훈련을 시범사열 할 때와 국왕이 문무 고위 관리들과 활쏘기를 할 때 사용되었던 궁궐의 건축물이다.
수막새(瓦當, roof-end tile)
수막새는 수키와의 한쪽 끝에 원형의 드림새를 붙여서 제작한 기와다. 수막새는 막새와 수키와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막새의 외부에는 둥근 주연이 있으며 내부에는 다양한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막새의 중심부에 동그란 자방이 표시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주연부분에 무늬가 없는 소문대가 대부분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주연부분에 주문이나 무늬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새겨진 무늬는 연꽃, 보상화, 귀면, 금수 등이다. 그 중 연꽃무늬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수막새의 제작 시기는 중국의 전국시대에 반원수막새가 제작되었다. 고구려시대에는 수막새 무늬가 4엽, 6엽, 8엽의 연화문이 많으며 잎이 뾰족하다. 백제시대에는 무늬가 4엽, 6엽, 8엽의 꽃잎이 넓고 얕게 표현된 연화문이 많고 간혹 卍 자 무늬와 무문 수막새도 제작되었다. 신라시대에는 수막새의 무늬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에는 고구려, 백제의 무늬를 모방한 것이 많았으나, 후기에는 두 나라의 특징이 혼합되어 신라화 된 연화문이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연화문의 문양이 화려해지면서 복판, 중판연화문이 제작되었고, 문양자체가 화려해졌다. 고려시대에 전기에는 무늬가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것을 답습하였으나 후기에는 원형돌기문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외에도 범자문 수막새도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대개 단순하고 퇴화된 연화문이 시문되었다.
경복궁(景福宮)은 대한민국 서울 세종로에 있는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이다.
궁의 넓이는 43만2703(432,703)㎡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이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2010년 현재 1차 복원사업이 완료된 상태다.[1]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아미산 굴뚝 등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