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수은 강항
본관 진주, 자 태초(太初), 호 수은(睡隱).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으며 강희맹의 5대손이다.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박사·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있을 때 후지와라 세이가(1561~1691)에게 성리학을 전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었으며, 많은 명유를 배출시켜 일본역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으며, 억류지였던 일본 대주사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강항은 뛰어난 유학자였다. 포로 신분이었지만 후지와라 세이가(1561~1619)에게 성리학을 전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었다. 2002년 일본 오오즈시에서는 강항을 일본 성리학의 원조로 평가하고 현창비를 세울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그는 일본의 지리와 군사시설 등을 몰래 고국에 보고하였다. 1600년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 그는 임금이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영광 고을에 묻혀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세운 학당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였다. 그림에도 뛰어나 많은 인물화와 소나무 그림을 그렸다. 영광 용계사(容溪祠)에 배향되었다.
주요 저서: 수은집, 간양록, 운제록, 건거록, 강감회요 등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 (1891년(고종 28년) ∼ 1943년)
원불교 교조.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처화(處化), 호는 소태산(少太山). 원불교에서는 대종사(大宗師)라고 부른다. 그는 어려서부터 (7~9세)사물에 남다른 호기심을 가졌다. ‘저 하늘은 어찌하여 높고도 파랄까? 바람과 구름은 어디서 오는가, 낮과 밤은 어떻게 바뀌는가?’하는 자연 현상과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부모님은 왜 사이가 좋은가?’하는 인간사에 대해 큰 의심을 가졌다. 그는 어른들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품은 우주와 인간사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11세 때에는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5년여 동안 산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세에는 고대소설에 나오는 도사 이야기를 듣고 도사를 만나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구도 관심은 내면으로 향하게 됐다. 22세에는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한 생각만 깊어져갔다. 마침내 이 한 생각마저 잊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 이른 새벽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소태산은 큰 깨달음을 얻은 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를 내걸고 진리적인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인 도덕의 훈련으로 고통 속에 헤매는 일체 생령들을 낙원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제자 9인을 교단창립의 중심인물로 삼고 저축 조합운동을 전개하여 모은 수익금으로 길룡리 앞바다를 막아 논으로 만드는 방언공사에 착수, 1년만에 논 2만6천여평을 확보했다. 1919년에는 백지장에 찍은 손도장이 핏빛으로 변하는 백지혈인의 법인성사를 나툰 후 변산에서 불법을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한 새로운 교법을 제정했다. 1924년 전북익산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열어 후천개벽의 새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28년간 교화활동을 하다가 1943년 6월 1일 53세의 일기로 열반하였다. 저서는 원불교 교전의 모체가 된 ❰불교정전❱을 비롯 많은 책들이 있다. 한국 4대 종교로 성장한 원불교는 현재 국내 500개 교당, 해외 70여개 교당과 원광대학교, 영산선학대학교, 교립 중고등학교, 대안학교 등 5개의 교육기관과 170여개의 복지기관을 갖추고 활발한 교화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2006 군종승인을 얻었다.
주요 저서: 주요 저서: 불교정전, 보경삼대요령, 보경육대요령(최초의 교리서), 불법연구회규약(노랑가위라 불린 최초의 간행물),수양연구요론(변산에서 초안된 교서, 필사본),조선불교혁신론(변산에서 초안한 교서), 예전(원불교 기본교서)
한국 무용가 공옥진 (孔玉振, 1931년 8월 14일 ~ 2012년 7월 9일, 전남 영광 출생)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민속 무용가이다. 한국 1인 창무극의 선구자로, 병신춤으로 유명하다.그녀는 2010년 11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6호 일인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녀는 남도판소리의 대가인 공대일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창을 익힌 후 일본에 건너가 최승희 문하에서 천대받는 생활을 하다가 귀국해 한동안 영광 다리 밑에 살며 문전걸식했다.
1947년 국극협회,임방울창극단에 참여했고 1948년 고창 명창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1951년 김연수 우리악극단에 참가, 1961년까지 조선창극단 등 많은 국악단체에서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이름을 펼치다가 10여년간 영광에서 농사지으며 지냈다. 그녀가 다시 예술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3년 남도문화제 출연을 계기로 혼자 소리와 춤, 연기와 모방을 하는 ‘1인 창무극’을 창안했다. 1978년 공간사랑 등 명무전(名舞展) 공연에서 아쟁, 대금, 장구를 잡아놓고 판소리창과 독특한 표정의 병신춤이 곁들여지는 1인 창무극을 선보였다. 그 중 ‘심청가’와 ‘수궁가’에 특징을 보여 일반대중 및 대학가에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공옥진은 수많은 병신춤을 만들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전해오던 곱사춤,문둥이춤, 앉은뱅이춤, 외발춤, 덩치춤, 동서남북춤, 오리발춤 등 57가지에 허튼춤, 턱붙은 곱사춤,엉덩이빠진 곱사춤, 절름발이 곱사춤, 오리발병신춤 등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독특한 포즈와 표정, 열정적인 판소리는 관객과 혼연일체가 되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한을 예술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남 영광읍 교촌리에 예술연수원을 설립, 후진양성을 하는 한편 국내외 공연활동을 활발히 했다.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문순태의 소설 ❰병신춤을 춥시다❱ (1982)로 그녀의 일대기가 소설화되기도 했다. 익살과 청승맞음, 숨김없는 꾸밈새 속에서 보여주는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몸짓은 걸인생활 속에서 터득한 민중적 세계관과 특유의 흉내 솜씨가 빚어낸 것이다. 그녀는 눈물과 웃음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몸으로 깨친 민중예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랑스러운 영광 인물’로 선정 될 만큼 영광을 사랑하고 대표하는 예술인이다.